REMEMBER 4·15
- 만세운동을 이끈 종교의 힘
안영선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우리나라 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이자 세계사의 한 획을 이룬 대표적인 비폭력 평화 만세운동이다. 3·1독립만세운동은 구국의 정신으로 무장한 종교 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기획한 항일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는 모두 33인인데 이를 종교별로 살펴보면 기독교도 16명, 천도교도 15명, 불교도가 2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권을 찬탈하고 무단통치를 일삼아 온 일본에 항거한 독립 만세운동에서 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독립 만세운동의 중심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동학 정신을 계승한 천도교나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종교가 추구한 사회적 참여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천도교는 오래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에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실천해 왔고, 기독교 역시 일본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사건으로 105명의 애국지사가 투옥되는 사건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보여 왔다. 또한 이들 종교는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교육 사업을 펼치고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 농촌 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여 민중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으니 이미 종교적 신앙을 통해 결속된 단단한 민족정신은 3·1독립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으리라.
천도교주인 손병희 등 민족 대표가 태화관에 모여 불씨를 피운 독립 만세운동은 서울(당시 경성)을 시작으로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을 거쳐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까지 확산하였고, 3~4월에는 경기도의 수원, 화성, 안성을 비롯하여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천안의 아우내 장터를 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졌다. 불꽃처럼 번지는 독립 만세운동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무고한 민중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다.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1919년 3월 31일(기념관 안내 자료에 따름) 발안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에게 보복할 목적으로 자행한 만행이다. 발안 장날 만세운동은 화성을 대표하는 독립 만세운동으로 종교인이 중심에 선 3·1독립만세운동과 많이 닮았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소장한 역사자료에 따르면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9명인데, 그중에 천도교인 17명, 기독교인 10명, 종교 미상이 2명이라 한다. 제암리와 고주리의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안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유는 두 마을의 특성을 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로부터 제암리는 이웃한 팔탄면 고주리와 경계를 이루는 제방과 논두렁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두렁바위’라는 친근한 자연부락명으로 불려왔다. 이덕주가 쓴 「3·1운동과 제암리 사건」에 의하면 제암리는 씨족 중심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3·1독립만세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갈 당시 모두 33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31가구가 순흥 안씨로 제암리는 안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제암리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을 살펴보면 천도교도가 제일 많았고, 다음 기독교, 유교 순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주민 모두 종교적 신념이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제암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전부터 동학이 포교 되어 천도교 신자들이 많았고, 기독교(감리교)는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후 빠른 선교를 통해 감리교회가 지어지면서 신자의 수도 증가했다고 전해진다. 제암리와 이웃한 고주리에는 많은 천도교인이 살고 있었으며, 마을 중심에는 신앙의 터전인 천도교당(전교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제암리와 고주리는 일찍부터 받아들인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을 높였고, 제암리에 건립된 감리교회를 통해 문맹 퇴치 및 신문화운동에 앞장을 섰다. 여기에 대한제국 시위대 출신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기독교인인 안정후, 천도교인인 김성렬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만들어 민중의 의식화를 이루고 발안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종교적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이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인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성경 구절이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천도교의 중심 교리, ‘하늘과 사람은 하나다’라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강조한 유교의 가르침, 널리 대중을 구제하는 데 목표를 두어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 불교의 교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구국의 정신은 제암리와 고주리를 포함한 화성 전역을 독립 만세운동의 성지로 만든 것이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일부 종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행태를 보면서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게 된다. 종교가 중심에 섰던 발안 장날 만세운동이 일탈을 꿈꾸는 일부 종교인들에게 진정한 종교의 가치와 역할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경종이 되기를 바란다.
‘REMEMBER 4·15’.
우리는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가 서로 연합하여 구국의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의 숭고한 희생자 29위 선열을 잊지 말고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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