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기억이 만든 그리움의 확장_이금한 시인 작품평
안영선(시인)
이금한 시인이 본격적으로 용인문학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5년 《용인문학》 26호에 시 「목공 23」과 「이방인들」을 통해서이다. 당시 그가 발표한 두 편의 시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주 노동자들의 고달픈 노동 현장과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실제 건설 현장을 오가던 시인의 눈에 비친 이주 노동자의 삶이 그의 시안(詩眼)을 통해 주옥같은 시편이 된 것이다. 이후 그해 12월 이금한 시인의 첫 시집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이 출간되었고, 2019년에는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두 번째 시집 『관덕정 일기』가 출간되었다.
이금한 시인은 2004년 《시사문단》으로 등단했다. 그가 용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2015년이니, 두 권의 시집 모두 용인문학회 활동 중에 이룬 성과라 할 수 있다. 지난 8년간 이금한 시인을 지켜보면서 그의 성실한 삶과 문학에 대한 열정, 인생 최대의 절망을 시로 이겨낸 창작 의지에 늘 존경의 마음이 앞섰다.
그의 첫 시집에 대해 권순진 시인은 ‘이금한의 시는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솔직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래서 가식이 없다. 누구든 그러지 않겠냐마는 그의 외로움과 허기도 존재의 본질적 영역에 있는 것이어서 영혼을 스스로 강화시키지 않으면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그 수단이 문학이었고, 그 시가 삶을 극복하게 해주는 튼튼한 면역성 기재였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시집인 『관덕정 일기』는 제주도에서 보낸 3개월간의 투병과 요양에 대한 기록으로 제주도에 머물면서 하루하루 삶을 기록한 일기와도 같은 시집이다. 그는 시인의 말을 통해 “희망은 몸으로 왔고 절망은 맘에서 사라졌다. 늦겨울 메마른 나뭇등걸처럼 잃었던 감각을 찾아가는 시간, 봄이 되자 고목의 밑동에서 새잎이 돋듯 마음에는 빛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은 추억이 되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었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절망의 끝에서 30여 년의 시편을 모아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희망의 시작에서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한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그 숫자는 더하고 더할 것이다. 삶의 궤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암 투병과 요양의 긴 시간 속에서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시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의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3개월의 제주 생활은 완벽한 현실 복귀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고, 그는 보란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멋지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필자가 아는 이금한 시인은 심성이 참 바르고 남을 잘 배려하는 사람이다. 또한 가족에 대한 애정도 많은 사람이다. 필자에게 도착의 몇 편의 시 속에서 이런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금한 시인. 그가 보내준 시편을 통해 새 시집이 담아낼 그의 세 번째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일 것이다.
비 개인 날 오후
한가한 길가 식당 입구에
절망의 꽃이 피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순간의 빛은
물결치는 도라지 꽃이었다
사랑을 여의고 고향 발치에서
서성이는 누이와 그의 딸
긴 그림자는 보랏빛이었다
세월은 흘러갔어도
꽃들은 어디에서나 늘 피어나고
그 자리에서 영글고 있었다
뒷산에 가득 피어나던 도라지꽃이
도시의 어느 길가에서 피어난 것은
누구를 또 여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조바심인 것이다
- 「도라지, 그 보라색 기억」 부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보다 더 슬픈 기억이 있을까.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도심에서 우연히 발견한 도라지꽃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누이와 조카의 긴 그림자를 떠올린다. 그 그림자는 보랏빛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도라지꽃과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보랏빛이 주는 이미지는 상처와 절망, 죽음 등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색깔도 보라색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랏빛은 절망과 죽음의 이미지를 넘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이미지로 읽힌다. 보랏빛 도라지꽃을 통해 망자는 산자를 그리워하고, 산자는 망자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함축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도라지꽃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절망의 세상에서 외로움이 씻기고 있다’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였다면 침묵하라
바뀌어 가는 마음의 색을 대비하여
의미를 잃은 시간들은 잊어야한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
남아있는 마지막 기억의 순간들
소멸함으로 순백으로
- 「소멸은 아름다워」 부분
언덕을 따라 작은 마을이 터를 지키며
온전한 이름을 기억하는 건 위안이었다
세월은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너는 언제나 무의미했고
지나갔다
기억의 순간에는 아득히
사라졌다
사랑과 추앙은 눈을 감으면
잊혀진 이름이다
(생략)
너의 이름을 기억하느라
사라지는 시간들
- 「잊혀진 묘역에서」 부분
위 시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의 상황 속에서 ‘소멸’과 ‘잊힘’이라는 안타까운 서정이다. 그런데 그 소멸과 잊힘이 단순히 안타까움으로 읽히지 않고 오히려 기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며, 다시 그리움으로 이어져 ‘순백’이 되고 ‘이름’이 되는 것이다.
위 시에서 ‘소멸’과 ‘잊힘’은 동의어로 읽힌다. ‘소멸’과 ‘잊힘’은 곧 그 존재가 현실에서 떠나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현상을 바라보는 화자는 스스로 침묵한다. 여기에서 침묵은 소멸이나 잊힘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침묵으로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잊혀져가므로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라고 말하는 화자의 간절한 염원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비록 묘역은 잊혀졌지만 ‘온전한 이름을 기억하는 건 위안이’라는 화자의 말은 마지막 행간에서 ‘순백’과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가을 늦게 세상에 오셨다가
가을 이르게 세상을 떠나가신 분
지난봄에는 된장찌개로 오시더니
올여름에는 장떡으로 오셨다가
냉면 면발로 다시 오신 계절은 가을이다
오이와 무김치 가지런히 올라간 냉면이거나
국수 삶아낸 그릇에 고추장 휘휘 풀어
잇몸이 입을 다 가리며 시원하다 크게 웃으시던
환한 대낮, 뜨거운 햇살에
- 「할머니의 계절」 부분
누구에게나 할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며, 아주 특별한 존재일 수 있겠다. 이금한 시인에게도 할머니는 그러했을 것이다. 쓸쓸해지는 가을날이면 더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할머니. 가을에 태어나 가을에 돌아가신 할머니였으니 ‘찬바람이 어깨를 감싸는 가을’이 오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배가 되었을 것이다. 냉면집은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간직한 곳인 듯싶다. 가을 냉면을 유난히 좋아하셨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개성집 이층 계단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특히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어깨를 감싸는’, ‘시원하다 크게 웃으시는’, ‘시원한 햇살 가락’과 같은 감각적 표현은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상황에 아름다운 기억을 소환하여 대상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다가
취기가 오르도록 마시다가
추억을 하나씩 꺼내어 물들어 간다
섭섭함과 원망 어린 목소리가 눅눅해지다가
기쁘던 일 하나 별처럼 떠올라 환한 밤,
사랑은 언제나 어둡고 고요한 기억 속에 있었으니
시할머니 모시던 어린 며느리의 때늦은 한숨이
식탁을 맴돌다 가슴을 치고 나온다
그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리워지는 영원이므로
엊그제 쓴 할머니의 일상이 걸어 나와
우리들 귓가를 울리며 시를 낭독하는 것이다
- 「그리움은 시가 되어」 부분
이 시는 앞에서 소개한 시편들을 종합하는 작품인 동시에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이금한 시인이 담아내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움은 시가 되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대상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여 그리움을 확장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소환되는 할머니와의 추억, 섭섭함과 원망이 가득하다가도 기뻤던 일 하나로 그리워지는 기억. 그 기억을 시로 담아낸 화자가 가족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는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리움에 취해 시가 되는 밤’이 화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기억이고 그리움일 것이다.
이금한 시인의 시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가 되는 매개체는 기억일 것이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병과 요양으로 이겨낸 이금한 시인이 보내준 작품들을 읽고 ‘죽음과 기억이 만든 그리움의 확장’이라는 시평을 보내며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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