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바라보는 대상과 시의 다양한 지향점
안영선(시인)
가끔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한다. 시인을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시인이 존재한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존재이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역사적 책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시인이 지닌 무한한 상상력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사물이 지닌 본질과 속성에 기대어 표현된 다양한 삶을 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이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문학과 현실은 숙명이다.
이 글에서는 전비담 시인의 「공무도하公務渡河」, 김명은 시인의 「차갑고 먼」, 이화우 시인의 「오르골」, 성두현 시인의 「봄이 오는 길목」, 필자의 「텃밭 가꾸기」를 중심으로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대상과 시의 다양한 지향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적 책무성
“지금 어디야?”1
“이태원에 사람들 심폐소생하고 난리 났는데 어디야?”1
“왜 연락이 안 돼?”1
“거기 너무 복잡해서 전화기 잃어버린 거지?”1
“제발 전화기 좀 봐”1
“혹시 거기서 쓰러진 거면 조금만 기다려 내가 달려갈게”1
“내 힘 다 줄게 조금만 더 힘내 제발”1
“사랑해”1
(중략)
공무원의 공무는 제대로 아니라 멋대로였다.
위패 없는 분향소를 설치하라는 공무가 있었고 근조라는 말을 없애고 그냥 까만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무가 있었고 참사가 아니라 사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는 공문의 공무가 있었다. 참사의 책임을 묻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웃는 얼굴로 농담을 하는 공무. 참척의 단장지통을 정치협상의 저울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요리하고 조리하는 공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저지르고 지껄이며 뽁뽁이놀이를 하는 공무가 있었다.
(중략)
일흔아홉 번의 피를 토하는 긴급구조요청 비명을
지나가는 무전으로 생각하는 공무원의 공무가 있었다.
영원히 ‘임’에게로 건너가지 못한 숫자 1과 함께
영원히 같이 빠져 죽은 공무가 있었다.
- 전비담 시 「공무도하公務渡河」 부분
전비담 시인의 「공무도하公務渡河」는 시인의 역사적 책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자메시지로 표현된 이태원 참사의 긴박했던 순간과 공무(公務)를 망각한 공무원의 공무(空務)가 수많은 죽음을 가져온 비극 속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과 지금 우리 사회가 지닌 고질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카톡으로 전달되었을 저 메시지는 가족의 애타는 울부짖음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어느 희생자의 죽음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1’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영원히 사라지는 않는 ‘1’이 주는 고통, 그 간절하고 절박한 순간에도 “공무원의 공무는 제대로가 아니라 멋대로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첫 행의 “지금 어디야?”라는 표현은 희생자의 위치와 상황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정부의 무능력한 상태에 대한 의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태원 참사는 “위패 없는 분향소”, “근조라는 말을 없애고 그냥 까만 리본을 착용하라”, “주최자가 없으니 축제가 아니”라는 공무원의 지침과 변명을 등에 업고 해마다 진행되는 행사였음에도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 빚은 참사이다. 책임자임에도 책임질 줄 모르는 무책임한 책임자들, 희생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무책임한 책임자들.
전비담 시인의 시에는 서사가 있다. 그 서사가 때로는 은유나 상징보다 강렬하다. 우리는 시인이 전달하는 강렬한 서사를 통해 급박했던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시 「기괴한 농담과 명랑한 진담 사이의 리베스토드」 역시 故 백남기 선생이 물대포에 쓰러진 현장의 상황을 “사랑의 죽음이 신화의 음률로”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편들은 죽음을 통한 사랑의 결합과 완성을 이루며 시인의 실천적 삶과 시의 지향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강물이 젖은 귀를 세우고 먼 곳으로 깊다 안으로 멀어진다
슬픔이 빠진 수면에 구멍을 뚫어볼까
그 사람도 신이 있는 곳으로 갔는지
신을 만든 사람들은 신을 앞세워 떼 지어 몰려다니고
사랑을 노래로 다 소비하고 멀어져간다
두 손을 포개 가슴 위로 올릴까 잔해 위로 올릴까
태우기 쉬운 종이와 낡고 오래된 기록들 침묵이 고요해?
마디마디 끊어지는 생각들
쥐새끼가 목울대를 찾는다 털목도리를 갉아댄다
햇빛을 좋아하는 생화는 반드시 시들고 어떤 날은
어느 날 강의 표정으로 바뀐다
물살이 세차게 달려와요 그 길이 아니잖아요
뛰쳐나와요 뒤돌아보지 말아요 멀리 내다봐요 다음으로
어둠이 동그랗게 자리를 잡으려고 알알이 맺히기 시작한다
열리기를 거부하는 한 사람의 영혼이 뜨거워 강물이 붉다
- 김명은 시 「차갑고 먼」 전문
김명은 시인의 시 「차갑고 먼」을 읽고, ‘죽음은 숙명일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짧은 찰나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에 다가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눈물을 쏟아냈을까를 생각한다면 죽음에 대한 평가나 정의를 쉽게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 송파 세 모녀 사건을 시를 다룰 적이 있었다. 경제적 빈곤이 주는 두려움을 감당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고, 그 어려움이 극단적인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여러 교사가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30년 이상 교직의 길을 걸어온 필자는 그분들이 겪은 심적 고통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교직 생활 중에 많은 학부모 민원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 다리 위에서도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곤 한다. 유서를 남기는 사람도 있지만 유서조차 남기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그 강물의 이미지는 시제처럼 “차갑고 먼” 곳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차갑고도 먼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들이 남긴 “태우기 쉬운 종이와 낡고 오래된 기록들”도 끝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도저히 추스를 수 없는 뜨거운 영혼이 차갑고도 먼 강물을 뜨겁고 붉게 물들일 뿐이다.
강물은 구분과 연결의 경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새로운 생으로 연결되는 경계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종교에서 물은 성과 속을 구분 짓기도 하고, 세례 의식을 통한 정화와 재생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며 정화의식을 갖기도 하고, 죽은 자를 화장하여 잔해를 강물에 띄워 보내면서 영적인 정화와 다음 생의 부활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 등에서는 침례 의식을 통해 정화와 재생을 위한 의식들을 행하기도 한다. 김명은 시인의 시 「차갑고 먼」을 읽으면서 강물을 붉게 물들이는 한 사람의 뜨거운 영혼을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적 책무성을 생각해 본다.
2. 두 대상의 이미지를 통한 상상력의 극대화
눈 나리는 그 일이 오르골 소리 같다
앞서간 반복이 자꾸만 따라 돌고
금속성 지붕 사이로 두터운 눈이 쌓인다
흩어지지 않고 놀이를 모으는 상자같이
차갑지만 뜨겁게, 차곡차곡 속삭이듯
두 눈이 바라다보는 아이들의 날개들
셀 수 없는 것들은 어둠 속에 있어서
꿈으로 이어가지 않으면 그을 수 없어
금이 간 유리문 위에도 손자국이 보인다
어리석게, 안아야만 옮길 그 무게를
녹으며 가늠하고 포개지는 존재를
비치는 세상 안에서도 나는 보지 못했을까
깊어지며 깊이를 모르는 궁금증은
무수히 지워지고 싹터오는 요람같이
감아도 떠 있는 곳으로 한없이 끌려간다
- 이화우 「오르골」 전문
이화우 시인은 이미지를 극대화할 줄 아는 시조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필자에게는 이 작품이 다소 어렵게 읽힌다. 시 「오르골」은 시적 구조와 이미지, 비유와 상징 등이 풍부한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가 지니는 정형성과 운율, 두 대상이 지닌 이미지의 병치는 이 시의 안정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선명한 이미지와 정서를 풍요롭게 한다.
시인은 “눈 나리는 그 일”과 “오르골 소리”를 일치시킴으로써 독자들이 눈과 오르골을 동일시하게 한다. 시각과 청각이 이루는 조화라고나 할까. 쉬지 않고 내려서 쌓이는 눈은 오르골처럼 음악적이고 반복적인 소리로 연상시키며 독자가 오르골 소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 첫 행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금속성 지붕 사이로 두터운 눈이 쌓이”는 구절에서는 눈의 두께와 차가움이 정서의 무게로 다가오는 듯하다. 이 시는 오르골의 시적 형상화가 돋보인다. “놀이를 모으는 상자”의 시각적 이미지와 “차갑지만 뜨겁게, 차곡차곡 속삭이듯”으로 표현된 촉각의 청각화는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시인의 “두 눈”에 비친 “아이들의 날개”는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어서 눈 내리는 장면이 오르골 소리와 연결되어 시간의 흐름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어둠 속에는 셀 수 없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지만, 꿈으로 연결하지 않으면 이것들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금이 간 유리문 위에도 손자국이 보이”는 것처럼 시간은 지나도 기억은 남아 현재의 시간에 이어진다. 눈이 녹는 것과 가늠하는 것, 오르골을 통해 비치는 세상은 자기의 내면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어린 시절 오르골은 누구에게나 꼭 갖고 싶은 선물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장난감 가게에서 들려오던 그 소리는 신비롭기도 하고 때로는 몽환적이기도 했다. 이화우 시인의 「오르골」을 통해 무한한 상상의 시간 속을 거닐어 보자.
3. 치열한 몸부림과 소멸을 통해 꿈꾸는 찬란한 봄
또 잔인한 계절을 맞이하는 돌아앉은 산들은 슬픈 배경이 되어 강물 속에 깊게 내려앉아 잠들고, 산비알 널브러진 언덕으로 봄바람에 까닭 없이 꺾여지는 굴절된 사랑들이 진달래 붉은 순정(純情)으로 초야(初夜)를 치르고 산 꿩들의 구애(求愛)로 봄은 달거리하듯 이내 뜨거웠다. 찬란한 내 인생의 봄도 그토록 잔인하게 가슴에 피멍을 만들고 봄이 오는 길목마다 점점이 산불을 놓고 있더라. 저무는 해가 있기에 피곤한 이른 아침을 맞이한다. 봄은 그렇게 피곤한가 보다.
- 성두현 「봄이 오는 길목」 전문
성두현 시인은 「봄이 오는 길목」의 첫 행에서 봄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바라보았던 봄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이 시는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싱그런 설렘보다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더 치열하게 다가오는 장면을 연출한다. 왜, 시인은 봄이 오는 길목을 잔인한 계절의 변화로 인식하는 것일까. 시인은 산들이 만드는 “슬픈 배경”과 “강물 속에 깊이 내려앉아 잠드는” 산으로 붉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봄바람에 까닭 없이 꺾여지는 사랑”이라 말하고, “달거리하듯 뜨거워진” 산 꿩들의 구애가 만드는 봄의 이미지는 “피멍을 만들고”, “산불을 놓는”다고 말한다. 이토록 처절한 생의 몸부림을 거쳐야만 우리가 바라보는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이 오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자연이든 우리 사회의 모습이든 순탄하고 평온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계절의 시작인 봄이 독자들에게 주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시인이 읽어내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관계를 상상해 보는 것은 이 시를 읽는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성두현 시인에게 봄은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중요한 소재이자 동시에 주제를 형상화하는 시적 대상이기도 하다. 봄은 아름답게 오지도, 편안하게 오지도 않는다. 봄은 오히려 온 산을 붉게 물들이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쉼 없는 노동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문득 이호우 시인이 꽃이 피는 절정의 순간을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한 고비”라고 노래한 「개화」의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쩌면 각고의 노력과 과정이 있었기에 봄은 더 찬란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숭엄한 장례일지도 모른다
생기 잃은 영혼을 위한 정갈한 의식
봉분마다 하관을 준비하는 땅이 열리고
무심하게 던져진 영혼 위에 뿌려진 흙은 묵언 중이다
틈틈이 영혼의 숨결을 살피러 온 고라니 사이
꽃마리, 강아지풀,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방동사니, 들깨풀, 중대가리풀, 개비름, 닭의장풀, 개망초, 질경이, 조뱅이, 뽀리뱅이……
애꿎은 것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땅속에서 문드러진 씨감자는
자신의 낡은 육신을 다 내놓고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한참의 시간을 흘린 불면의 궤적
지상을 뚫고 나오는 저 연록의 생을
환생이라 불러도 될까
- 안영선 「텃밭 가꾸기」 전문
필자의 시 「텃밭 가꾸기」는 필자가 양평에서 생애 처음으로 텃밭을 가꾸는 이야기를 담은 시편이다. 이 시에서는 텃밭을 가꾸며 씨앗을 심고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소멸과 생성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이라는 알고리즘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텃밭이라는 공간은 죽음의 경험과 생명력이 마치 순환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성두현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크게 무관하지 않다.
이 시에서는 봄의 파종을 “숭엄한 장례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경건하고 신성한 작업일 것이다. 그토록 신성한 존재이기에 땅속에 묻힌 씨감자는 자신의 육신을 모두 썩혀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에 몰두할 것이다. 문드러진 육신은 넉넉한 밑거름이 되어 한 생명의 자양분이 되고, 그렇게 피어난 생명은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신비로운 현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가을 사라졌던 “꽃마리, 강아지풀,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방동사니, 들깨풀, 중대가리풀, 개비름, 닭의장풀, 개망초, 질경이, 조뱅이, 뽀리뱅이”와 같은 숱한 생명들이 다시 고개를 내미는 것은, 자연의 환생이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이렇듯이 봄은 시련 속에서 온다. 고통을 수반한 기쁨이라야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텃밭’은 죽음을 맞이하는 소멸의 공간인 동시에 죽음을 넘어 생을 불어넣는 신성한 공간이며, ‘텃밭 가꾸기’는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환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업인 셈이다.
* 2023년 [화성작가 4호]
'내가쓰는散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영선-죽음과 기억이 만든 그리움의 확장 (0) | 2023.07.24 |
---|---|
안영선-공룡알 화석산지의 미래를 꿈꾸며 (0) | 2022.11.18 |
[서평] 안영선-따뜻한 시선이 시의 옷을 입다 (0) | 2022.11.12 |
안영선-우리 마을에 맹꽁이가 살아요 (0) | 2022.07.31 |
REMEMBER 4·15_안영선 (0) | 2021.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