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 쌓기
안 영 선
요즘 들어 날씨가 따듯해지고 제법 거름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야릇한 감흥을 느끼는 날이 잦아지자 작은 아이의 보채는 횟수도 잦아졌다. 일요일 아침이면 눈을 뜨기 바쁘게 ‘오늘은 몇 시에 산에 갈 거냐?’며 조르는 것이다.
어렵사리 가족여행이라도 계획하려고 하면 이내 엄마 아빠나 잘 다녀오라며 고개를 돌리던 몇 달 전의 그 녀석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내의 맞장구에 신이라도 난 듯 나를 더 몰아세우는 아이의 등살에 못 이겨 옷장 속에 감춰 둔 등산복을 챙겨 입는다. 일요일 하루 정도는 마음 편히 쉬려던 굳은 결심도 아이의 해맑은 투정 앞에서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녀석이 이렇게 등산에 집착하는 것도 그 원인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의 최근 행동을 곰곰이 되뇌어 보며 그 원인을 찾는 노력을 시작했다. 작년 말부터인가 텔레비전에서는 유난히 먹을거리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아들은 그 프로그램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햄버거며, 라면 따위의 인스턴트식품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 야단법석 하는 아이를 보면서 참말로 미디어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어린 녀석이 저리 야단이지 모르겠다며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에게 푸념 섞인 넋두리만 해대곤 했다.
가족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도 된 냥 주방에서 라면부터 추방하던 아이가 이제는 부쩍 산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이 벌써 다섯 번째 산행이다. 물론 처음 산행을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녀석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유난히 귀가 얇은 탓이리라. 건강에 좋다고 하니 바로 시작은 해야겠는데, 혼자 산을 오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들과의 동행이었다. 처음에는 아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 대화도 나눌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컴퓨터 게임을 끄고 따라나서던 녀석의 모습이 어느새 지친 내 몸을 이끄는 상황이 되었으니 나로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들과 함께 오르는 석성산은 일명 성산이라고도 불리는 용인의 수호산이다. 탄천과 오산천의 발원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용인 시민들에게는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산이다. 이런 산을 가까이 두고 사는 것도 어찌 보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산을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오르는 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작은 소망이기도 했었지만 아이의 보챔이 계속될수록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봄볕에 나른하게 졸고 있는 일요일을 깨운 것도 아들이고 보니, 계속해서 꽁무니를 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집을 나섰다. 사실 집을 나서는 것이 힘들지, 이왕 나선 다음에야 즐거운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도착한, 물맛 좋기로 이름난 백령사 약수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저마다 족적을 남기고 있다. 아들과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을 마신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비탈길에는 흙 위로 작은 생명체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것이리라.
“우리 아들은 산에 오는 게 좋은가 봐?”
“응, 좋은데. 다리가 너무 아프다. 좀 쉬면 안 돼? 아빠!”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제법 그늘진 곳에 앉아 쉬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녀석이 쉬지도 않고 주변에 널려 있는 돌멩이를 주워 작은 돌탑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돌탑을 쌓는 주위에는 이미 여러 개의 작은 돌탑들이 눈에 띄었고, 그 중에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교한 것도 있었다. 큰 돌과 작은 돌을 섞어가며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큰 돌과 작은 돌의 어울림이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아들이 쌓은 돌탑도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그만 올라갈까?”
“잠깐만, 탑을 만들었는데 소원을 빌어야지.”
“무슨 소원을 빌거니?”
“그건, 비밀.”
비밀이라고 단호하게 내뱉는 아이의 한 마디에 무안해진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겸연쩍게 웃음으로 넘기며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돌탑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던 아들이 이번에는 내 손을 잡아끌고 다시 앞장을 선다. 그러고 보니 아들을 처음 산에 데리고 왔을 때, 돌탑을 보고 무척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묻던 생각이 난다. 그 후 성산에는 우리 아이의 손으로 만든 작은 돌탑이 몇 개쯤 생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녀석의 소원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꽤나 진지한 모습이라 비밀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피곤에 지쳤는지 아들은 책가방을 챙긴 후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것저것 널브러진 아이의 책상을 정리하던 아내는 아들의 공책 하나를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읽다가 내게 건네준다. 공책을 건네주고 고개를 돌리는 아내의 눈가가 빛나는 것으로 보아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눈물과 입가를 가득 채운 미소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아이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 하나가 아내와 나의 공허했던 마음에 촉촉한 봄비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산행을 시작하기 몇 일전에 아내와 병원을 다녀왔다. 귀밑에 볼록하게 종양이 생겼기 때문이다. 초음파 검사 결과 양성이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이에게는 큰 걱정거리로 남았던 것이다. 더욱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쉬고 싶다는 얄팍한 술수로 이 종양을 악용했으니 아이에게 준 충격도 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 순간에 마음속을 흔들어 댄다.
아빠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작은 손으로 정성껏 돌탑을 쌓던 아이가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의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워 본다. 아이의 따듯한 체온이 살며시 내 몸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내가 먼저 산에 가자며 녀석에게 조르겠다고.
(용인문화 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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